지난편에 이어, 나머지 동래구의 국가유산을 즐겨보려한다. 이번에는 동래시장구역과 금강공원구역 두 곳이 멀리 있는 관계로 버스로 이동해 본다. 도보로 움직이기엔 어중간한 위치라 시간을 알차게 쓰기 위함이다.
"부산의 역사는 동래다!"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정도로 동래에 대해 알게 되었고, 기대된다.
<즐기기 포인트 및 경로>
1. 동래 장관청(시 유형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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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송공단(시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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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래부 동헌(시 기념물)
충신당(시 유형문화유산), 망미루(시 유형문화유산), 외대문(시 유형문화유산)
▩ 버스 이동 (동래시장정문 ▷ 온천장)
4. 온정개건비(시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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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임진동래의총(시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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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금정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시 유형문화유산)




장관청 가는 길에 여기가 동래라는 걸 바로 알 수 있는 조형물이 나오고, 이정표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국가유산이 한 구역에 다 모여 있어 방문하기에 매우 편리했다.
시 유형문화유산 < 동래 장관청 >

☞ 요약 : 1669년(현종)에 동래부사 정석이 창건하고, 여러 차례 중건 한 동래부의 청사 중 하나로 군장관의 집무소였다.




옛 모습 그대로 보존 상태가 좋았다. 규모는 아담한 정통 한옥으로 도심속에 이색적인 느낌이었고, 고즈넉하다
시 기념물 < 송 공 단 >




☞ 요약 : 1742년(영조)에 동래부사 김석일이 건립하여, 동래읍성 남문 밖 농주산(현 동래경찰서)에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 외 순절한 분들의 제단을 이곳으로 모셔왔다.
현재 7단 15기로 구성되어, 정단에는 충렬공송상현순절비, 동단에는 조영규․노개방을, 서단에는 문덕겸 등을, 별단에는 송상현의 첩 금섬 등을 모시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은 기와지붕에 올라 기와를 걷어 왜적과 싸우다 순국한 이름 모를 두여인과 왜적과 맞서다 순국한 수많은 여인들을 기리는 비석(왼쪽 사진)이다.
동래성 전투는 수많은 여인들도 전쟁으로 내 몰았을 만큼 절박했다는 것이다. 왜적들로 포위 당해 도망칠 수도 없고, 항복하면 짐승만도 못하게 유린 당할것이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싸우다 죽는 것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얼마나 두려웠을까...

또 특이한 것은 관노 철수,매동 효충비(오른쪽 사진)다.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거두어 달라는 송상현 공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 드리기 위해, 따라 죽고자 한 마음을 누르고 목숨을 걸고 공의 시신을 수습한 관노들의 충절을 기리는 비다.


임진왜란에 공적을 잊지 않고, 많은 선열들의 넋을 기리는 곳이 부산에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내가 국가유산 찾기 하면서 느낀게, 임진왜란 대표 위인에서 조선 전체에서 이순신 장군님이지만, 부산지역은 송상현 공이 대표적인 위인이라는 걸 발견했다. 부산의 곳곳에서 송상현 공의 나라와 백성을 위한 충절 뜻을 기리는 유적을 발견 할 수 있다.
시 기념물 < 동래부 동헌 >


☞ 요약 : 조선시대 동래지역의 행정, 국방, 교역을 도맡아하던 중심 관아로 임진왜란 이후에 동래의 중요성이 크게 인식되어, 독립적인 위상으로 승격하였고, 관아도 대대적인 증.개축 등으로 왜구를 막기 위한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시대로 오면서 오랜 행정중심의 위상과 정통성 말살하기 위해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부산포를 부각시키기 위해 동래군으로 격하시키고, 여러 건물을 철거 및 이전 당하는 수모를 격기도 했다.


시 유형문화유산 <동래부 동헌 충신당>
☞ 요약 : 1636년(인조)에 동래부사 정양필이 창건하여, 조선말까지 동헌으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 후 동래군청, 양산군 보건소 동래지소 등으로 사용되어 원래 모습을 많이 상실했다.



동래부사가 바라보는 시점이다. 여기서 동래부의 중요한 행정업무를 했을 것이다.

연심당 : 부사의 관사 또는 문신들의 대기소로 추정


약사청 : 공공의료시설 완대헌 : 부사의 휴식공간

고마청 : 말을 관리하는 건물


동헌 내에 말을 관리한다는 것은 그만큼 말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수단이자 자원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시 유형문화유산 < 망 미 루 >
☞ 요약 : 1742년(영조)에 동래부사 김석일이 세웠고, 이후 어느 부사가 임금에 대한 그림움을 달래기 위해 망미루로 불렀다고 한다.
동래읍성 4대문 여는 시각과 정오를 알리는 큰 북이 걸려 있었던, 조선후기 전형적인 관아 문루로 부산지방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그리고 1919년 동래에서 3.1운동은 여기서 시작했다고 한다.



찬주헌 : 부사를 경호하던 비장의 근무 공간

독경당 : 부사의 휴식공간 또는 무사들의 대기 장소로 추정

부사(부윤) 선정비류 : 수령이 선정을 베풀고 떠나면 남은 주민들이 선정을 기리고자 세움. 동래구에 30여기가 확인된다.


시 유형문화유산 <동래부 동헌 외대문>
☞ 요약 : 1636년(인조) 동래부사 정양필이 건립하였고, 이후 여러차례 중건하였다.
일제시대에는 시가 정리 이유로 금강공원으로 옮겼다가 2014년8월15일 지금 자리로 복원 되었다.
1655년(효종) 경상좌병영 휘하에서 독립하여 동래독진이 되었음을 알리며, 진변병마절제영(鎭邊兵馬節制營)과 교린연향선위사(交隣宴餉宣慰使)라는 현판에서 알수 있듯이 대일 외교 및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관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일제강점기때 그들이 동래부 동헌을 시가지를 정비한다는 이유로 철거하고, 이전하고, 옛모습을 없애려 했는지 알 것 같다.
이곳이 바로 일본의 침략을 막아 낼 수 있는 조선의 방패이자, 군사적 요충지다.
또한 임진왜란때 결사 민족항쟁의 가슴 뜨거운 피흘려 지켜온 항일의 상징적인 곳이기 때문에 일제의 입장에서는 매우 껄끄럽고 불편한 곳 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동래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일본에게는 위협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음 목적지인 금강공원으로 가기 위해 근처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 근처 '동래시장정문' 버스정류장에서 100번 버스를 타고 '온천장' 정류장까지 간다. 20분 정도 걸린다.


온천장 정류장에 내려서 도보로 첫번째 장소 온정개건비로 간다.



가는 길에 윤슬길 노천 공공 족욕시설도 본다. 현재 운영은 하고 있지 않구만... 동래 온천장은 예전부터 유흥업소와 맛집이 즐비한 곳이다. 조만간 한잔하러 방문해야겠다.
시 기념물 < 온 정 개 건 비 >

1691년(숙종)에 돌로 만든 두 개의 낡은 탕을 1766년(영조)때 동래부사 강필리가 대대적인 수리를 하여 공로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신라시대부터 온천물이 뜨겁고 품질이 좋아 병자가 목욕을 하면 병이 잘 낫는다는 이야기가 많았고, 신라왕들이 자주 찾았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온천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에게 실권을 빼앗기는 아픈 역사도 있는 곳이다.



여기 비석이 있는 곳은 1960년까지 온천수를 뽑아 올리던 곳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동해안쪽에 온천이 많은 것 같다. 온천을 즐기는 나로서는 다음 기회에 우리나라 온천 역사와 유적에 대한 컨텐츠로 즐겨볼 계획을 세워 본다.
'임진동래의총'과 금정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만나러 금강공원으로 가는 길.
이곳은 내 대학시절에는 낡은 주택가였다. 지금은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서 그때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어색함?
그래도 도로 정비가 깔금해져 금강공원 찾는 것은 편리해졌다.


시 기념물 < 임 진 동 래 의 총 >

☞ 요약 : 임진왜란때 동래부사 송상현공과 함께 동래성을 지키다 순절한 군.관.민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1731년(영조) 동래읍성을 수축할때, 격전지인 남문터에서 수많은 유골과 포환, 화살촉이 발견되어, 이 충절의 유해를 거두어 산성대 서쪽(현재 내성중학교 부근)에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웠다. 이후 일제시대 토지개간으로 몇차례 이전하다가 현재 금강공원으로 옮겨왔다.




저 무덤 안에 수많은 순국선열들의 유해가 있다.
임진왜란 최초 격전지에서 수많은 왜군들에 당당히 맞서 마지막까지 장렬히 싸우신 우리 선조들께 늘 감사드린다.
잠시 묵념을 하고 왔다.


'임진전망 유해지총' 임진왜란 끝난 140년 뒤 동래부사 정언섭이 동래성을 고쳐 쌓을때 남문터에서 수많은 유해와 섞지 않은 화살촉 탄환 등이 발견되어, 당시 겹겹히 포위된 상황을 생생히 알 수 있었다.
송상현 공을 따라 목숨을 던진 수많은 이름 모를 군민들을 생각하며 슬픔에 탄식하며, 향후 그 넋을 기리기 어떤 방식으로 정성을 다 할 것이며, 유해의 자리는 밟아서는 안된다는 후대에 당부의 말이 적혀있다.
동래부사가 수많은 유해들의 생생한 모습을 발굴하면서, 당시 동래성 전투의 격렬하고 처절했던 상황을 생생히 느꼈던 것 같다.
글 귀에서 그의 애통함과 후손으로서 감사함을 여실히 느낄 수 있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금 정 사


시 유형문화유산 <금정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요약 : 1677년 전라도 대둔산 용문사에 봉안했던 것으로 수화승 '혜의' 와 7명이 제작에 참여했다.
당시 조각승 혜희 작품의 양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수인은 하품중생이고, 상체를 앞으로 약간 숙여 아래를 굽어보는 듯한 자세로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나 하체의 무릎너비가 넓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온 김에 공양을 드려본다. 부처님, 불법, 스님, 아버지, 어머니, 누나매형, 민준이, 지인들 그리고 나의 깨달음에 기도를 올린다.




이 곳은 과거에 도자기를 굽던 가마가 있던 공터라고 한다. 지금은 금강공원 안 가족들이 나들이 나와 놀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조금 더 올라가면 동래의 명물인 동래 케이블카도 탈 수 있다. 공원 숲의 신선한 나무, 풀 냄새를 맡으며 상쾌한 기분으로 둘러본다.



학창시절 종종 방문했던 금강공원에서 지난 추억을 되세기며 온천장 역까지 걸어간다.


온천장 할아버지상
1926년 부산시내 전차가 온천장까지 연장운행 개통 기념으로 종점에 세워져, 오랜 시간 온천장의 수호신 역할을 했다고 함.
눈에는 전구가 있어 밝게 빛났고, 모자는 서양식 옷은 조선식으로 당시 신.구 조화를 보여주는 것 같다.
누가 조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온천장의 격동의 시절을 묵묵히 지켜온 상징으로 이제는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 같다.
동래구 키워드는 항일, 임진왜란, 동래성 전투, 송상현 공, 대일외교요충지로도 표현이 충분 할 것 같다.
그리고 조용히 상상해본다.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거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 고향의 명칭이 '부산광역시'가 아니라 '동래광역시'가 되지 않았을까?
일본제국주의가 두려워한 동래, 그래서 최초 일본인의 정착촌인 부산포를 확장시켜, 동래를 집어 삼킨 아픔의 역사가 아닐까?
민족의 기상이 서려 있고, "동래가 곧 부산!"이라고 당당하게 말 할 수 있을만큼 자랑스러운 동래편을 마무리한다.
<부산광역시 동래구2편 요약>
- 국가유산 종류 : ★ ★ ★ ☆ ☆
- 보존 관리 상태 : ★ ★ ★ ★ ☆
- 방문 편리성 : ★ ★ ★ ☆ ☆ 2시간 30분 소요(도보 2시간 10분 + 버스 20분)
- 방문자 스탬프 : 0개 - 총평 : ★ ★ ★ ☆ ☆
※ 동래구 1편, 2편 전체를 총평하면 ★ ★ ★ ★ ★ 부산의 역사를 보고 싶다면 무조건 들려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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